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와해 === 1180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던 대제 마누일은 결국 임종을 맞았다. 1176년의 패배 이후 안티오키아 공작 자신이 보낸 병력 또한 미리오케팔론에서 궤멸되어 이를 이끌던 장군 보두앵도 전사하기까지 하자, 주변국들은 동방 로마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병중에서도 히엘리온과 리모키르, 마이안데르 강에서 [[룸 술탄국]]에게 패배를 안기며 자신이 겪은 치욕을 만회하려 노력했고,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 100년간 건실하게 다져온 중앙군은 아직 건재하였지만, 그의 어린 후계자 [[알렉시오스 2세]]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티오키아의 정치 지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2세와 그의 섭정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보에몽 3세의 강력한 지지자였기에 더 이상 그는 로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안티오키아의 시빌라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했지만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역사가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그녀는 살라흐 앗 딘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동로마와 멀어지게끔 만들려 보낸 [[미인계]]였다고 한다. 그는 조강지처 테오도라를 버리고 시빌라와 결혼했다. 총대주교 에메리는 이 결혼을 반대하며 그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보에몽은 이미 시빌라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결국 총대주교는 그를 파문했다. 보에몽은 파문장을 접수하자 마자 군대를 이끌고 총대주교의 집무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선대 공작들에게 수십 년 동안 시달렸던 총대주교 에메리는 녹록치 않았다. 이미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의 영지인 요새로 도피한 총대주교는 수성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가 에메리의 성채를 공성하는 동안 안티오키아의 세력이 약해지길 바란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용]]의 군대, 그리고 동방 제국의 관리들, 독실한 프랑크인 기사들이 보에몽을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중재하에 에메리와 화해해야 했다. 수십 년에 걸친 동로마와의 관계는 이 결혼과 함께 단절되기 시작했고,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사주한 폭동으로 그의 누나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죽고 수만 명의 라틴인들이 동로마인들에게 학살당하자 동로마와 안티오키아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